지난 2013년, 도쿄에서 후지필름 엔지니어 몇 분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SLR과 비슷한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의 목업 디자인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. 디자인 콘셉트에 대한 반응이 그다지 열렬하지 않았던 것이 똑똑히 기억납니다.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여러 사진가와 마찬가지로 저는 레인지파인더 스타일의 카메라를 무척 좋아했지만(지금도 좋아하고), 기존 SLR 카메라와 비슷한 디자인이면서 좀 더 유연하고 다방면에 쓸 수 있는 일용 기종이라면 나름대로 장점이 있겠다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. X-T 시리즈는 제게 바로 그런 카메라가 되었습니다. 그래서 후지필름 디자이너, 엔지니어와 제품 관리자가 끝까지 노력해 결국 X-T1으로 결실을 맺은 제품을 제작하게 되어 기쁩니다.
X-T1은 제가 당시 사용하던 X-Pro1에서 크게 진일보한 제품이었습니다. 하루아침에 괜찮은 오토포커스, 3방향 틸팅 LCD는 물론 이외에도 많은 장점을 갖춘 반응형 카메라가 생긴 것입니다. X-T2는 해상도와 속도 면에서 업그레이드한 모델이었습니다. 이 모델은 제가 영상 작업용으로 사용하게 된 첫 후지필름 카메라였는데, 비주얼 스토리텔링 용도로 더욱 다재다능한 도구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. 그러다 X-T3가 나왔는데, 솔직히 처음에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. 약간만 업그레이드되었을 뿐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. 2,000만 화소가 늘어나고, 속도도 약간 빨라진 정도로 말입니다. 하지만 후지필름이 늘 그렇듯, 이것 또한 사소한 업그레이드 수백 가지가 축적되어 하나의 큰 도약을 이룬 결과였습니다. 이 카메라가 출시된 이후 제가 이 모델로 촬영한 사진과 영상 프로젝트가 수백 건에 달합니다.
X-T4는 제가 보유한 적이 없어서 이렇다 할 의견이 없습니다. 이 모델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, 잘 쓴(과로한) X-T3가 수명을 다하면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. 그런데 지금까지도 X-T3가 멀쩡합니다. 짐벌에서 두어 번 떨어졌는데도 말입니다.
그리고 이제 X-T5가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. 지난 두어 달 동안 프로토타입 모델을 써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. X-H2는 이미 사용해본 경험이 조금 있어서 센세이셔널한 신형 4020만 화소 센서와 파워풀한 신형 프로세서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. 이 모든 기술력을 이 작은 X-T5에 모두 담을 수 있었다니 믿기 어려울 지경입니다. 해상도가 넉넉히 보장되어 대형 인쇄에도 좋지만, 크롭을 많이 할 때도 유리합니다. 저는 워낙 쇼트를 세심하게 구성해서 크롭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, 현실은 이상과는 다른 법입니다. 제가 하는 작업은 대부분 빨리 움직여야 하고, 요즘 고객은 같은 사진이라도 여러 가지 미디어에 쓰기 위해 다른 크롭 버전을 요청합니다. 이 정도의 해상도가 보장된다면 그만큼 저한테는 편한 일이니, 고해상도 센서는 확실히 반가운 발전입니다. 특히 실제 사용 시 노이즈나 다이내믹 레인지 등에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더 반가웠습니다.
사실 저는 스틸 사진을 촬영할 때 내장 손 떨림 보정 기능에 그다지 신경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. 그러나 이번에 드디어 새 IBIS 시스템의 능력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. 간단히 말해 전에는 생각도 못 해본 광범위한 선택지를 열어주는 시스템입니다. 영상에는 IBIS가 스틸 사진보다도 더 유용합니다. 영상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, X-T5는 대체로 스틸 사진 위주의 카메라이지만 영상 기능도 훌륭한 것을 여러 가지 갖추고 있습니다.
X-T5에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가치 있는 존재는 단연 신형 X-Processor 5입니다. 이 프로세서가 초고속으로 작동하고 확신이 담긴 신형 AF 시스템을 구동하는 주역입니다. X-T3와 X-T4에서도 얼굴과 눈동자 인식 기능이 그럭저럭 괜찮게 작동했지만, 저는 아무래도 피사체가 움직이거나 피사계 심도가 얕을 때는 이 기능을 사용하기 망설여지는 편이었습니다. 하지만 지금은 계속 오토포커스를 설정하고 조리개를 활짝 열고서, 얼굴/눈동자 인식 기능을 믿고 맡깁니다. 대신 저는 기술적인 부분에 신경 쓰지 않고 제 피사체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. 이 프로세서 덕분에 전 세대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졌고, 덕분에 전반적인 사용 경험 자체가 더 좋아졌습니다.
다만, 카메라에 어떤 기술적 기능이 있든 유저가 그 카메라를 들고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. X-T5는 X-T 라인 고유의 특징을 그대로 고수했습니다. 전 세대인 X-T4보다도 그런 면이 더 두드러질 정도입니다. 클래식한 다이얼, 탄탄하지만 콤팩트한 바디, 우아한 선을 보면 더 많이, 더 잘 찍고 싶은 의욕이 솟아납니다.
거의 20년간 이 일에 몸담아온 전문 사진가로서 제게는 여러 가지 용도에 따라 다양한 카메라를 고를 선택권이 주어집니다. 하지만 제가 접하게 되는 다양한 작업을 해낼 카메라를 딱 한 대만 고르라면, 아마 X-T5가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. 이 카메라에서는 르포르타주 작업에 맞는 빌드 수준과 속도가 보장됩니다. 광고 작업의 경우 꼭 필요한 해상도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. 인물사진을 찍을 때면 저와 피사체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하지 않는 카메라입니다. 여기에 화룡점정으로,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아 삶을 기록하는 저의 작업에 동반자로 충분합니다.